언니가 보낸 DHL이 목요일에 도착한다는 문자를 월요일 아침에 받았다. 참 좋은 세상이다. 한국에서 보낸 소포가 이리도 단숨에 오다니!
암환자를 위한 운동법/호흡법/장의 미생물/천연식초에 대한 공부는 의외로 재미있었다.
집에 온 지 열흘이 지났다. 퇴원할 때의 당찬 포부와는 달리 집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가지 못했다. 추위와 함께 코로나도 발목을 잡았지만 더 큰 이유는 아직 허리를 반듯하게 펼 수 없어서다. 집 안에서 수시로 걷고 제자리걸음을 하고 잘 때는 쿠션을 삼단으로 쌓아 다리를 올리고 잔 덕분인지 다리 부종은 많이 나았다. 그런데 갈 곳 잃은 부종이 아랫배로 모인 듯 아랫배가 부르고 불편하다. 어쩌다 아랫배로 모이는지는 이해하고도 남는다. 해결 방법을 모른다는 게 문제지. 답답할 때는 책이 답이다. 유튜브도 있는데 정보가 넘쳐서 고르기가 어렵다. 언니가 보내준 책들 중 암환자를 위한 맞춤 운동법 책이 있었다. 자궁암과 부종을 찾아보니 몇 가지 운동법이 소개되어 있기에 따라 했다. 등을 바닥에 대고 누워서 다리를 벽으로 뻗기. 두 다리 들고 자전거 타기. 두 다리 교차하기. 두 발로 원 그리기 등 어렵지는 않았다. 복부에 힘이 들어가서 두 손으로 무릎 뒤를 받치고 조심조심 하고 있다.
부종과 함께 최대의 문제는 호흡이었다. 수술 후 호흡이 가쁘고 자꾸 입으로 숨을 쉬게 되었다. 잘 때는 더 심해서 화장실에 가려고 잠이 깨면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의식적으로 코로 숨을 쉬려고 노력 중이다. 요즘은 많이 개선되었지만 그럼에도 예전보다 호흡이 얕은 건 사실이다. 언니가 보낸 책 중 호흡의 중요성을 다루는 책도 있었다. 그중 호흡근을 단련하는 스트레칭이 있어 따라 하고 있다. 굳어진 어깨와 목과 등까지 풀 수 있어 좋다. 뭐니 뭐니 해도 제일 큰 과제는 음식이다. 대단한 보양식 같은 걸 말하는 건 아니고 내가 먹고 싶은 것과 해 먹을 수 있는 것 위주로 선택한다. 록다운임에도 이번 주부터 일을 시작한 조카를 자꾸 오라 가라 하기도 어렵다. 온다고 하면 반갑게 맞기는 한다. 내가 생각지 못한 메뉴를 해 줄 때는 고맙다. 조카의 엄마인 내 육촌 언니도 수시로 전화를 해서 수술 경과와 음식을 살핀다. 얼마 전 언니는 시골에 집을 장만했다고 한다. 우리가 어릴 때 살던 방식으로 아궁이를 내고 가마솥을 걸고 청국장을 뜬다고. 청국장이 항암효과가 크다고 말려서 가루로 보내주겠단다. 고맙고 고맙다.
어느 구독자님이 댓글에 쓰신 것처럼 회복기에는 소화가 안 된다고 가장 먼저 현미 잡곡밥 대신 쌀밥을 먹으라고 한 것도 육촌 언니였다. 다음날 당장 쌀밥으로 갈아탔다. 문제는 쌀밥이 소화에는 좋은데 계속 먹기가 어렵다는 거다. 건강에 전혀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 소리를 듣고 우리 언니가 현미잡곡밥으로 죽을 끓여 먹는 방법을 책에서 보았단다. 괜찮은 해결책 같았다. 따라 해 봐야겠다. 엊그제는 잔멸치 볶음이 먹고 싶어서 잔멸치에 호두를 넣고 볶아 보았다. 비트도 어떻게 먹을까 고민하다가 간장 초절임 하는 법도 찾았다. 즐겨 보는 브런치 작가 라슈에뜨님의 레시피를 참고했다. 설탕을 안 넣고 간장을 끓일 필요가 없다고 해서 나도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간장과 식초를 3:2로 잡고 오이, 양파를 잘라 넣기. 비트나 무를 추가해도 된다는 말에 귀가 번쩍 했다. 순한 순두부 국을 끓여주러 온 조카에게 말했더니 엄청 쉽네요, 하며 즉석에서 담가주고 갔다. 브로콜리와 생비트로 겉절이까지 준비해 주었다. 생비트가 생고구마 맛이 나는 것도 이번에 알았다. 라슈에뜨님의 레시피 중에는 비트 김치도 있었다. 언젠가 해 봐야지. 생소했던 비트와 이렇게 점점 친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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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부터 나는 우리 집 아파트 계단을 걷고 있다. 1층에서 5층까지 걸어서 내려갔다가 걸어서 올라오기. 오전과 오후에 한 차례씩 오르내린다. 마스크 때문인지 금방 숨이 가쁘다. 앞으로 산책을 나가게 되더라도 마스크는 필수다. 나는 면역력이 떨어진 환자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내가 현관문 밖으로 나가 아파트 계단을 걷자 가장 기뻐한 사람은 남편이었다. 남편은 요즘 매일 사무실로 출근 중이다. 오전 8시에 온라인 수업이 시작되는 아이와 나를 위해 아침을 준비해주고 출근한다. 저녁에는 마트가 문을 닫기 전인 8시 전에 퇴근해서 장을 보고 돌아온다. 어제 오전에는 친시어머니이신 카타리나 어머니가 먹거리를 잔뜩 챙겨서 잠깐 들리셨다. 꿀과 과일과 채소와 각종 치즈와 남편과 아이가 좋아하는 비엔나소시지와 오븐에서 데우기만 하면 되는 즉석 라쟈냐까지. 지퍼백에 따로 넣어주신 용돈은 남편에게 보고만 하고 내가 챙겼다. 차 한 잔 안 드시고 현관문 안에 선 채로 내 안부만 확인하고 가셨다.
어제는 무슨 날인지 오후 늦게 시누이 바바라도 왔다. 내가 한번 말한 적 있는 빨간색 물주머니를 사 왔다. 토요일에는 우릴 위해 요리도 해준다고 한다. 저녁으로는 카타리나 어머니가 주신 라쟈냐를 아이와 하나씩 데워먹고 집으로 돌아갔다. 요즘 독일은 저녁 9시 이후에 돌아다니면 벌금을 내야 한다. 누가 오더라도 저녁 8시만 되면 일어서니 좋다. 바바라가 오기 직전 율리아나네도 다녀갔다. 예전에 음식을 넣어 보낸 유리그릇을 챙겨 왔다. 내 모습을 보고 안심이 된다며 율리아나 엄마 이사벨라가 기뻐했다. 누들을 넣고 태국식으로 끓인 치킨 수프도 주고 갔다. 이게 끝이 아니다. 낮에는 부산의 Y언니 전화도 받았다. ‘너희 언니한테만 부탁하지 말고 나한테도 적극 필요한 거 말하라’라는 게 요지였다. 나는 무슨 언니들 복이 이리 많은가. Y언니의 목소리만 듣고도 힘이 났다. 마지막으로 우리 언니가 보낸 책도 도착했다. 안 그래도 지난번 보내준 책 중 마지막 권을 읽고 있었다.
이 책들을 다 읽으면 뭐하지? 그때까지 언니가 보낸 책들이 안 오면 어쩐다? 고민은 필요 없었다. 언니가 보낸 DHL이 목요일에 도착한다는 문자를 월요일 아침에 받았다. 참 좋은 세상이다. 한국에서 보낸 소포가 이리도 단숨에 오다니! 요즘 내 병에 대해 깊이 공부하느라 문학책은 손을 놓고 있다. 할 수 없지. 일에는 우선순위란 게 있으니까. 체력과 면역력을 되찾고, 산책을 가고, 일상을 문제없이 해 나갈 수 있을 때 다시 읽으면 되니까. 일단 봄이 오는 4월까지 체력을 60~70%까지 끌어올리는 게 목표다. 지금은 40~50% 정도다.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낮을지도 모른다. 봄이 오면 모든 상황이 나아질 것이다. 산책도 오래 할 수 있을 테고, 무엇보다 해가 더 자주 나올 것이다. 그때쯤이면 내 위장도 수술의 충격에서 벗어나 안정을 되찾을 것이다. 아직 소포 박스를 개봉하지는 않았지만 이번에 온 책들은 열댓 권이나 된다. 책 읽기는 즐겁다. 거기다 골라 읽는 즐거움은 말해 무엇하랴. 암에 대해 알아가는 것도 좋다. 책 속에 길이 있다. 없으면? 뭐가 걱정인가. 만들면 되지!
조카가 담아준 오이+양파+비트 피클(위 왼쪽) 카타리나 어머니가 보내신 꿀벌(위 오른쪽)과 다양한 먹거리들(아래)
P.S. 많은 구독자분들이 댓글과 이메일로 좋은 정보를 알려주셨습니다. 현미 잡곡밥에 대한 생각. 양배추를 쉽게 삶는 법. 독일에서 직접 콩나물을 키우는 법. 한인마트에서 온라인으로 콩나물을 주문하는 법. 힘내라고 보내 주신 대추와 각종 차와 잡곡. 아이에게 주라고 보내 주신 문구류. 따뜻한 위로와 글들. 일일이 답글을 달지는 못했지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작가: 마리 오
뮌헨에 살며 글을 씁니다. 브런치북 <프롬 뮤니히><디어 뮤니히><뮌헨의 편지> 등이 있습니다.
본 글은 마리 오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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