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는 식탐이 있는 편이다. 세상에 궁금한 맛이 많다.
‘먹어봤자 아는 맛’이라는 다이어트계의 명언이 있지만 나는 ‘아는 맛도 다시 보자’라는 음식계의 베이컨 주의가 좋다. (여기서 베이컨은 로즈 드 퐁파두르(Rose de Pompadour) 저리 가라의 그 예쁜 핑크빛 삼겹살이 아니라 경험주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을 의도한 것이었으나 왠지 그 짭조름한 베이컨을 의도하고 싶기도 하다.)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랬다. 그러므로 그 아는 맛이란 게, 알면 알수록 우리에게 힘이 된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아는 건 복습해야지. 오늘따라 그 아는 맛이 내 기분의 버프를 받아 이십삼 배쯤 맛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제목을 보고 좋은 음식을 가려먹고 과식하지 않도록 절제하는 이야기를 연상하셨다면 죄송하다. 절제를 못하는 이야기, 혹은 안 하는 이야기를 할 참이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 일인지도.
이 사회가 너무 절제하라, 명상하라, 몸을 돌보고 마음을 챙겨라, 하고 한 목소리로 외쳐대는 소리가 나는 사실 조금 듣기 싫다. 음식에 관해 우리 사회는 약간 노이로제에 가까운 신경질과 강박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온갖 매체에 아름다운 몸매로, 더할 나위 없이 신뢰감 가는 모습으로 등장하는 각종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딱 스님처럼 먹으라는 얘기로 들린다. 절밥이 맛있는 것은 진리지만, 그리고 아마 몸에도 좋을 거라고 생각은 되지만, 나는 그렇다고 매 끼니로 절밥을 먹고 싶지는 않은 범인(犯人 말고 凡人)일 뿐이다. 사실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로 식탐이란 건 왠지 우리 무의식 안에서 죄와 연결되어 있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고백하건대 박사과정 자격시험을 볼 때의 나는 도리토스로 이루어져 있었다. 끊임없이 도리토스를 입 안으로 밀어 넣으며 5일 동안 미친 듯이 책 한 권 분량의 지식을 토해냈다. 그러므로 내가 박사라는 타이틀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5할 정도가 도리토스 덕이다. 나의 학위 취득에 기여한 도리토스가 모두 몇 봉지였는지는 차마 세어보지 않았는데 세어볼 걸 그랬다. 마감이 얼마 남지 않은 글을 쓸 때는 좌 땅콩 우 화이트 와인이다. 절제 같은 건 딱히 없다. 땅콩이 든 그릇을 컴퓨터 왼쪽 앞에 놓아두고 (캔인 경우에는 입구가 나를 향하도록 눕혀 두는 섬세함도 잊지 않는다) 화이트 와인 한 병을 오른쪽에 잔과 함께 세팅한다. 그리고는 화이트 와인을 무슨 총명탕 마시듯 마셔댄다. 땅콩도 함께 마신다. 남편이 가끔 한소리 한다. 제발 땅콩을 마시지 말라고.
내가 먹다가 정신을 잃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땅콩과 칩류가 대표적. (술도 그렇지만 여기선 일단 침묵하기로 한다.) 분명 시작할 때는 정신이 멀쩡했는데 중간에 잠시 영혼이 가출했다 돌아와서는 ‘아니 이걸 내가 방금 다 먹었다고?’ 하며 화들짝 놀라곤 하는 것들이다.
나는 봉지에 든 감자칩이 너무 좋다. 그 얇디얇은 금빛 원반을 쥐었을 때 코끝에 살짝 스치는 고소한 향, 입 안에서 파삭파삭 부서지는 식감과 계속 당기는 유혹적인 짠맛, 손가락 끝에 살짝 남는 기름기까지, 모든 것이 완벽하다. 한국에 있었을 때는 질소의 비율이 좀 흠이었지만 이곳의 감자칩들은 인심도 넉넉하다. 견과류로 말하자면 전생에 겨울을 나려고 모은 땅콩들을 인간에게 모두 빼앗겨 화병으로 죽은 다람쥐가 아니었을까 싶을 만큼 모든 견과류를 집착적으로 사랑한다. 맛있기로는 피칸이나 호두, 캐슈, 잣, 피스타치오의 맛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느끼하다는 생각 없이 무한정 들어가는 건 역시 땅콩이다.
너무 달아빠진 밀크 초콜릿은 내겐 약간 고통이지만, 적절한 달콤함이 기분 좋은 다크 초콜릿도 가끔 나의 영혼을 소환한다. 리터 슈포트(Ritter Sport)라는 로고가 찍힌 매끄러운 흑갈색 격자무늬 판을 집어 들고 똑 부러뜨려 입에 넣은 뒤 그걸 녹여 먹지 않고 우적우적 씹어먹는 기쁨. 한 조각으로는 어림없다. 서너 차례 부엌을 들락거리며 결국은 한 줄을 모두 씹어먹곤 한다. 그럴 거면 차라리 처음부터 네 조각을 다 먹는 게 어떠냐 싶지만 이건 들락날락하면서 한 조각씩 먹는 게 맛이다.
아이를 키울 때도 딱히 절제를 시키지는 않았다. 몇 살까지 단 것은 금지, 탄산음료도 금지, 이런 엄격한 방침을 가진 부모들이 있을 테고 그 안에 든 사랑을 깊이 존중한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어쩌다 ‘세상에서 가장 유익한 곤충은 대충’이라는 모토를 가진 엄마에게서 태어났지 뭔가. 우리 인생 내일 당장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인데 먹어도 되는 거면 먹어라. 아프지만 않으면 된다. 아이가 어릴 때는 아이를 안고 냉장고나 찬장을 연 다음 소스 맛을 하나씩 살짝 보여주는 짓 같은 것도 놀이처럼 했었다. 세상에 이런 맛이 있구나, 하고 경이로운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는 그 ‘처음의 표정’을 사랑했었다. 그래, 이런 맛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세상에 네가 태어난 거란다. 행복하게 즐기렴.
나를 아는 지인들은 내가 굉장히 건강한 식생활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보기에 따라서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내 식생활을 지배하는 제1 원리는 맛이다. (영순위는 돈, 그리고 제2 원리는 아마 귀찮음일 거다.) 우리 꼬맹이들은 살짝 쪄낸 브로콜리를 엄청 좋아한다. 그 모습을 본 몇몇 지인들이, 자기네 집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아이를 정말 건강하게 먹인다고 존경의 눈길을 보내곤 했다. 브로콜리가 몸에 좋다니 감사한 일이지만 실은 찐 브로콜리가 일단 맛있기 때문에 먹인 거다. 달고 맛있는데. 동일한 원리로 아이들에게 라면도 먹인다. 짭짤하고 맛있어서. 이 맛있는 걸 엄마 아빠만 먹는 게 미안해서.
라면이라고 하니 생각나는 일화가 있다. 내가 고등학생 때였나. 아빠가 라면이 드시고 싶다고 하셔서 작은 냄비를 불에 올리고 물을 부었다. 어디서 어설프게 주워들은 건 있어서 라면을 끓이면서 생기는 거품을 걷어냈다. 아빠가 드실 거니까 신경 써서 잘 끓여야지, 하면서. 그런데 그 모습을 본 아빠가 펄쩍 뛰셨다. 그게 맛있는 부분이라고. 그렇다. 나는 그런 아빠 밑에서 자란 딸이다.
나는 커피를 거의 마시지 않는다. 몸을 끔찍이 아끼는 사람인 줄로 종종 오해를 하시기도 한다. 아니 그랬으면 술부터 안 마셨겠지.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마셨을 때 입이 텁텁해서 싫다. 치아에 착색이 된다는 얘기도 딱히 매력적이지 않았다. 반면에 커피 향은 정신을 잃을 정도로 좋아한다. 남편이 갓 갈아낸 원두를 조금 훔쳐서 책상 위에 두고 방향제 내지는 각성제로 사용할 정도로. 그러니 몸을 생각해서라기보다 그냥 취향이 그런 것이다. 차(茶)라는 좋은 대체재가 있고 그 맛을 더 선호하기에. 그래도 ‘절대로’라는 건 별로 없다. 이웃 분께서 예쁘게 웃으시며 내려주시는 커피는 감사의 마음으로 따뜻하고 달게 마신다. 더운 여름날 길을 걸을 때 얼음이 달그락거리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 손에 있으면 얼마나 행복한지도 잘 안다.
비슷하게, 내가 직접 만든 빵이며 쿠키를 아이들에게 먹이는 건 내가 소위 말하는 좋은 엄마(솔직히 좋은 엄마의 정의가 뭔지 잘 모른다)라서, 혹은 집밥의 신화나 홈베이킹의 미덕을 수호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만드는 게 재밌어서 그런 것이다. 아이들도 밀가루를 봄날의 황사처럼 흩뿌리며 반죽을 주물럭거리는 걸 무척 좋아하기 때문에 온 집안이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귀찮음이 그 즐거움을 납작하게 눌러 버릴 때면, 나는 마트에서 방부제가 넉넉하게 든 베이커리류를 두둑하게 사서 몇 주를 지내기도 한다.
나는 기본적으로 누가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는 편인데 (그래서 자기 계발서를 될 수 있는 한 멀리하는 인간이기도 하다. 그냥 이렇게 살다 죽을란다.) 우리 사회가, 아니 지구 전체가 우리 입 안으로 들어가는 것들을 갖고 유난히 호들갑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지는 얼마 안 됐다. 신선한 식재료, 천천히 만든 집밥, 너무 과하지 않은 몸집, 이런 것들이 좋다고 생각하고 이런 것들을 지키려 애를 써온 시간들이 길다. 나도 좋다는 걸 고루 먹고 나쁘다는 건 피하고 싶은 아주 평범한 인간이다. 그런데 볼수록 이건 아니다 싶다. 이런 걸 입에 넣는 건 미친 짓이고, 이 음식은 악마가 음식의 형상으로 우리 앞에 놓인 것이며, 이 따위 걸 즐겨 먹다간 일찍 죽는다는 식의 위협과 폭력이 너무도 난무한다. 너무 안 먹는다는 걱정보다 너무 많이 먹는다는 걱정이 십만 배쯤 많은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걱정의 무게가 이렇게 불균형하다니, 자연스럽지 못하다.
우리 모두에겐 그런 순간들이 있다. 내면의 어떤 감정에 제약을 두지 않고, 그냥 자연스럽게 터져 나가 밖으로 흐르도록 내버려 두는 순간. 슬픔을 통제하지 않고 바닥을 볼 때까지 그냥 하염없이 울거나, 상대에게 빠져드는 마법 같은 순간에 마음에 아무런 빗장을 달아두지 않고 마음껏 달콤한 열망에 푹 젖어있는 사치를 부려보거나. 슬픔의 심연까지 가라앉아 보거나,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누군가를 열망하는 일 같은 건 꽤 아름다운 일이다. 심지어 참았던 분노를 쏟아내는 일, 상대를 걷잡을 수 없이 질투하는 일 같은 것도 우린 때론 괜찮다고,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마음에 담아두는 것보다는 그렇게 내보내는 게 건강한 거라고 등을 두드려 주기도 한다. 그런데 왜 절제 못하는 식욕의 경우만 유독 한심하게 여기거나 죄악시하는 걸까. 그것도 온 사회가.
그러므로 나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먹고 싶은 음식에 탐닉하는 순간은 정상적이고 괜찮은, 때로는 꽤 근사한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잡채를 버무리던 손으로 말랑말랑한 당면과 채소를 한 움큼 푸짐히 쥐고서 볼이 메어지도록 입에 밀어 넣는 그런 행복 같은 것, 갓 지은 밥에 김치가 너무 맛있어서 몇 번이고 밥을 푸고 김치를 리필하는 그런 즐거움 같은 것, 한 번 뜯은 감자칩 봉지의 그 멈출 수 없는 유혹에 그냥 모른 척 나를 내맡기는 것, 뷔페에서 모두가 ‘이제 그만’을 외칠 때 홀로 분연히 떨쳐 일어나 ‘한 번 더’를 외치는 패기 같은 것. 사랑스러운 순간이고 행복한 순간이다. 대체로 쓴맛인 인생에, 이런 게 반짝이는 낙 아닌가.
물론 사회 통념과는 좀 다른 것 같은 이런 말을 내뱉어도 비교적 너그럽게 받아들여진다면 그건 내가 그리 살찐 사람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키가 작은 탓도 있겠지만 우리 사회가 여자 몸무게로 가장 이상적이라고 규정해 놓은 수치에 근접해 있는 인간이기에 뭔 말을 해도 ‘그래라,’ 이런 관대한 마음이 되는 걸 안다. 내가 가만히 있어도 턱이며 배를 몇 겹으로 곱게 접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이 글의 매력(… 같은 게 있다고 가정해 보자…)이나 신뢰도는 뚝 떨어질 테지. 왜 저렇게 사냐고 비난들을 하겠지. 그러므로 나는 이런 몸무게를 가졌을 때 마음껏 하고 싶은 말을 할 참이다. 죄책감 없이 맛있게 먹자고. 그렇게 뭘 먹을 때마다 안절부절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물론 기본적인 조건이 있다. 우리 몸의 정화 능력이 믿음직하게 돌아가는 일이다. 이 세계가 스스로의 자정작용을 통해 밸런스와 균형을 유지하듯이, 소우주인 우리 몸 안에서도 비슷한 종류의 자정작용이 일어난다. 그 멋진 능력을 믿고 우리는 가끔 행복하게 폭식도 하고 신나게 과음도 하고 몸에 나쁘다고 알려진 맛있는 것들을 입에 욱여넣는다. 그러므로 그 자정작용이 망가지면 우리는 좋아하는 음식에의 탐닉이라는 이 기쁘고도 즐거운 기회를 잃게 된다. (태어날 때부터 자정작용에 다소 문제가 있는 아이들이나 그 부모들에게 이 글이 아픔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자정작용이 무너지는 순간이란 간단하다. 병을 얻는 순간. 그러니 나의 건강을 유지해야 한다는 기본 조건은 충족시켜야 한다. 사실 어려운 조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요구받는 조건들의 기준이 오히려 터무니없이 높다. 우리는 종종 고행을 하는 수도승이나 체급을 줄여야 하는 운동선수에 우리 식생활의 기준을 맞출 것을 요구받곤 한다. 그러니 아프지 않은 범위에서, 심각하게 정신 차리지 않아도 될 그런 범위에서라면 죄책감 없이 즐겼으면 좋겠다.
인류가 이렇게 풍부한 먹을 것을, 그것도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었던 시대는 그리 길지 않았다. <식탁과 화해하기>를 쓴 루비 탄도의 말을 빌자면 오늘날에는 “지상의 모든 음식이 우리의 수저 끝에 있다.” 부모님 세대만 해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음식 이름들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일반명사가 되어 있다. 그녀의 말대로 우리는 어쩌다가 운 좋게도 콰트로 치즈 와퍼와 온갖 양념을 뒤집어쓴 각양각색의 치킨들, 그리고 떡볶이와 냉면과 다양한 맥주가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도리토스가 있고, 그냥 팝콘도 아닌 캐러멜 팝콘이 있다. 좀 즐겨도 되지 않을까. 맛있게 양껏 먹는 일이 흠이 되거나 놀림감이 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좋겠다. 특히 여자가.
논어 선진 편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안연이 죽었다. 공자의 곡소리가 지나치게 슬펐다. 주변의 제자가 말했다. 선생님, 슬픔이 지나치십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지나쳤더냐? 저 사람을 위해 지나치지 않고, 또 누굴 위해 지나친단 말이냐?
나는 도리토스를 위해, 땅콩을 위해, 좋아하는 화이트 와인을 위해, 좀 지나칠 예정이다.
- 작가: 이진민 / 제7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대상 수상/정치철학 박사
미국서 두 아이를 낳아 현재 독일에서 거주 중. 철학을 일상의 말랑말랑한 언어로 풀어내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 본 글은 이진민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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