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중순 어느 날
폭풍 같은 20여 일이 지나고 나는 지금 한국에 돌아갈 때까지 머물 에어비앤비에 와 있다. 드디어 그리도 갈망하던 더없는 평화를 찾았는데 한 편으론 또 허무함이 밀려드는 것도 사실이다. 끝이 보이지 않던 모든 과정이 끝났고, 절대 오지 않을 것 같던 그 날이 지나고 보니 막상 ‘그냥 이렇게 진짜로 끝인가’라는 생각에 헛헛한 마음마저 든다. 며칠 째 머물고 있는 에어비엔비는 전형적인 유럽형 주택이라 족히 3미터는 넘는 높은 층고에 복도식 구조를 갖추고 있어 머무름 자체로 여행하는 기분이 들지만, 잠깐의 여행을 끝내고 나면 다시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이랄까.
10월이 시작되고 본격적인 해외 이사 준비에 돌입하면서 하루하루가 도전의 연속이었다. 이삿짐 견적을 받은 후 짐을 혹여 다 싣지 못할 수도 있다는 얘기에 급히 물건들을 중고로 처분하거나 무료 나눔 하고, 버려도 버려도 어디선가 계속 나오는 버릴 것들을 정리하고, 이사 물품 포장을 위한 분류 작업과 미리 포장해둘 필요가 있던 물품들을 직접 박스에 포장하는 등 해야 할 선작업이 태산이었다.
한국에서의 포장 이사였다면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겠지만, 포장 이사 개념 자체가 없고 그나마 해외 이사 시에 해주는 포장 서비스도 한국의 그것과는 너무 달라서 파손 등을 경험했다는 불만족 사례들을 여러 번 들었던 터라 내 몸이 고되어도 미리 철저히 준비하는 쪽을 택했던 것이었다. 게다가 컨테이너 짐이 우리보다 늦게 도착하는 탓에 한국에서의 생활을 위한 품목들도 빠짐없이 체크해 미리 바리바리 챙겨두어야 했고, 갑작스레 또다시 귀국 일정이 다소 늦어지면서 부랴부랴 구한 에어비앤비에서의 한 달을 위한 ‘간이 이사’도 준비해야 했으며, 비어 있는 한국 집 세팅을 위한 과정도 여전히 함께 진행 중이어서 매일 하루 24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모를 정도였다. 이사가 끝난 뒤 바로 다음 날 집주인에게 집을 반납하기 위해 받아야 할 ‘청소 상태 점검’은 아예 미리 준비할 형편조차 안 됐다.
하루는 포장, 다음 날 컨테이너에 싣기 등 이틀에 걸친 이사는 결과적으로 가장 쉬운 절차였다. 손이 많이 가는 자잘한 짐들을 거의 포장해두거나 분류해둔 덕에 포장 과정도 비교적 쉽게 마무리됐고, 무엇보다 일을 맡긴 독일 팀들의 이삿짐 포장이 제법 꼼꼼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널찍한 엘리베이터를 갖춘 집이라 짐을 내리고 싣는 과정도 일사천리. 하루 만에 충분히 끝낼 수 있는 일을 왜 이틀에 걸쳐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지만, 독일은 워낙 노동자의 하루 노동 시간을 절대 준수하는 나라이니 그럴 수밖에. 포장을 하는 당일에도 매 한 시간 반 ‘노동’ 후 다 같이 어디론가 사라져 20~30분씩 쉬고 돌아오는 그들을 보니 한국 이사 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과 너무나 대비됐다.
현실적으로 해외 이사보다 더 힘들게 느껴진 건 독일 내에서의 이사였다. 업체가 도와주는 제대로 된 이사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한 달 임시 체류를 위한 에어비앤비로의 이사는 온전히 우리 가족의 힘으로 해야 하는 터라 고달프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그래도 생활자로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물품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총동원된 이민가방이며 여행 캐리어는 물론 짐 꾸러미들을 차로 몇 번씩 실어 나르고,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의 1층(한국식 2층)까지 들어 올리는 과정에서 나는 고된 노동의 끝을 보았다. 컨테이너를 보냄과 동시에 차라리 독일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갔더라면 훨씬 더 수월했을 것을, 이런 상황을 만들어낸 ‘코로나 현실’에 화가 났다.
초인적 힘을 발휘해야 하는 순간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사를 마친 후 집주인에게 집을 반납하기 전 받아야 할 ‘상태 점검’의 관문이 남아 있었기 때문. 3년 넘게 사는 동안 때로는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닦고 쓸면서 살았는데도 막상 짐을 다 뺀 후 비어있는 상태의 집은 여기저기 손댈 데가 많았다. 일찌감치 검색이나 지인의 조언을 듣고 사둔 청소 용품 및 세제류만 약 50유로어치. 손에 지문이 닳아 없어지도록 그간 살았던 흔적들을 지우는 동안 나는 몇 번이나 ‘대체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어떤 집주인은 욕실 하수구까지 점검했다고도 하고 또 어떤 집주인은 대충 체크만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새 집에 입주했으니 새 집 상태로 반납하라’는 우리 집 관리인의 한 마디가 순간순간 떠올라 멈출 수도 없었다.
‘깨끗함의 끝을 보여주마’ 하는 이상한 오기가 생겨 눈물이 쏙 빠지도록 청소를 끝낸 뒤 마침내 점검을 받고 열쇠를 반납하는 순간, 관리인은 대충 둘러보며 ‘알레스 굿(alles gut, all good)’이라고 말했다. 긴장감이 풀리면서 순간 허무함이 밀려들었다. 온갖 청소 방법을 검색해가며 스스로 완벽에 가깝다고 만족해했는데 그동안 나는 무엇을 했던 것인지, 여기저기 보여주면서 ‘잘했다’ 말 한마디라도 듣고 싶은 심정이었다. 남편 분석에 따르면, 여느 세입자들처럼 석 달치 월세에 달하는 보증금을 내고 거기서 파손 등의 비용을 빼고 정산하는 방식이 아닌 우리는 6개월치 월세에 달하는 금액을 보험으로 처리할 수 있는 보험 상품에 가입해 있는 덕에 꼼꼼히 점검할 필요가 없었던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새 집 상태 반납’ 이야기는 왜 했던 것인지, 들인 시간과 노력과 돈이 아까운 순간이었다.
30분도 채 되지 않은 반납 절차를 마무리하며 열쇠를 돌려주고 나니 그제야 집과의 이별이 제대로 실감이 났다. 이사 전날 이 집에 너무나 정들었다며 눈물을 쏟던 아들아이를 달래는 동안 한편으론 그저 이 고단한 절차가 어서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나도 가슴이 먹먹했다. 아이를 예뻐해 주던 옆집 젊은 커플과 언제나 밝게 웃으며 아이의 피아노 소리가 너무나 좋다고 말해주었던 아래층 아주머니, 그리고 맡겨진 택배를 찾으러 갈 때마다 미안해하는 나에게 오히려 따뜻하게 대해준 0층(한국식 1층)의 달마시안 한 마리 키우는 젊은 부부와 일일이 작별 인사를 하던 순간에는 어느새 울컥 눈물이 핑 돌았다. 엘리베이터에 만난, 별로 왕래가 없던 이웃도 우리의 떠남을 아쉬워하며 앞날의 행복을 빌어주던 때에는 우리가 얼마나 훌륭한 이웃들과 3년을 지냈는지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아이가 직접 쓴, 우리의 이사를 알리며 그동안 멋진 이웃이 돼줘 고마웠다고 남긴 마지막 인사 편지를 집집마다 우체통에 넣어두기를 참으로 잘했다 싶었다.
집 앞에서 기념사진 한 장 남기고 돌아오는 길, 남편이 물었다. “이사 힘들어서 두 번은 해외에 못 나갈 것 같지 않아?” 힘든 걸로만 치면 맞는 말인데 선뜻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쌓은, 모든 험난하고 힘든 과정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을 행복하고 소중한 기억들이 너무 많아서.
<오늘의 깨달음>
지나고 보니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아직은 옛 동네가 그리우면 잠깐씩 가서 걸어볼 수라도 있지만, 이제 곧 마음으로만 사무치는 그리움을 느껴야 할 테지. 베를린을 생각할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를 우리 집,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 작가: 어나더씽킹 in Berlin/공중파 방송작가,종합매거진 피처 에디터, 경제매거진 기자, PR에이전시 콘텐츠 디렉터, 칼럼니스트, 자유기고가, 유럽통신원 활동 중, ‘운동화에 담긴 뉴발란스 이야기’ 저자
현재 베를린에 거주. 독일의 교육 방식을 접목해 초등생 남아를 키우며 아이의 행복한 미래에 대해 고민합니다.
- 본 글은 어나더씽킹 in Berlin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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