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P. 13
M – Maske (가면)
신입생 오리엔테이션과 첫 학기 시작 사이에는 일주일간의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일종의 성취감의 물결 같은 것이 내 마음속으로 밀려와서, 집 안에 있을 때나 집 밖을 쏘다닐 때도 나는 그 물결에 붕 떠 있는 기분이었다. 그 성취감의 근원은 분명했다. 그것은 ‘소속감’이었다. 어딘가에 속한다는 것은 개인 차원으로의 소명이 필요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소속감 없이 지낸 지난 1년 반 동안 나는 꽤 난감한 기분으로 지냈다. 독일에 살고 있지만 발은 독일 땅에 닿지 않은 채로 둥둥 떠 있는 기분이었고 어학원이 아닌 곳에서 나를 소개해야 할 때면 마치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시선을 늘 발끝을 향했다. 땅과 달리 물에서는 발이 땅에 닿지 않아도 괜찮다. 물결에 몸을 맡기고 몸에 힘을 빼고 나면, 오히려 땅이 발에 닿을 때보다 그 자유로움을 즐길 수도 있다.
이어지는 주변의 축하는 성취감으로 가득 찬 나의 수조에 우쭐함까지 채워 넣어, 수조는 참방참방 넘칠 듯 아슬한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그 안을 신나게 부유하던 나에게 슬슬 내려와야 하지 않겠냐고, 물에 떠다니는 것도 좋지만 언젠가 땅을 밟아야만 한다며 불안감이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조의 물이 빠지는 데는 딱 일주일이 걸렸다.
대학원의 수업 첫 시간에는 오리엔테이션을 주재했던 교수가 들어왔다. 앞으로 한 학기 동안 수강할 과목들에 대해 소개를 해주었는데, 그의 설명은 강의실 안 모두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빠르면 아침 9시부터 늦게는 저녁 7시까지 빽빽이 차 있는 시간표가 빔프로젝터를 통해 강의실 앞 흰 스크린에 띄어졌기 때문이다. 3개월 정도의 시간 동안 8개의 과목이 동시에 진행되는데, 그중 5개는 학기 말에 시험을 봐야 했고 나머지 3개는 실습과목으로 과제물을 제출해야 하는 수업이었다. 강의실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수군거리는 소리로 가득 차기 시작했고, 몇몇은 장난스러운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교수는 학생들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코웃음을 쳤고, 심지어는 즐기는 듯해 보였다. 교수가 다시 말을 잇기 위해 입을 열자 설명을 듣고 싶었던 몇 학생은 주변 학생들에게 눈치를 주며, 그래도 그의 변명을 들어보자는 듯한 태도로 교수를 빤히 쳐다보았다.
“네, 저는 여러분의 반응을 이미 예상했어요. 하지만 우리 대학원은 진심으로 공부하고자 하는 학생들만 남기를 원합니다. 원하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포기하고 나가도 좋아요. 나가는 문은 여러분도 알 거예요. 다른 교수들도 이를 원하는 바예요. 이번 학기는 네 학기 중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 될 것입니다.”
정중하지만 단호한 태도로 말을 마친 그는, 나갈 학생이 없다면 세부사항을 이야기해도 좋냐고 물었고 의기양양한 태도로 전달사항을 마저 전하고는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그로부터 이틀 후 다른 수업을 듣기 위해 학교에 다시 나왔을 때, 6분의 1가량의 학생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을 다시 볼 수는 없었다. 남은 학생들은 혹독한 시간표대로 개강 첫 주부터 여러 명의 교수가 진행하는 수업을 듣게 되었다. 여전히 커리큘럼의 강도에 구시렁대는 학생들이 있었지만, 남은 이들의 눈빛은 대체로 오리엔테이션 당시보다 더 굳은 결의로 차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중에서도 가장 충격에서 헤어 나오기 힘들어했었다.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첫째 주의 기억이 아주 희미하게 남아있을 정도였다. 시간표에 맞춰 강의하러 들어오는 교수들은 저마다의 억양과 강세를 가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재무제표와 관련한 강의를 하는 교수는 마치 급한 일을 앞둔 사람처럼 늘 아주 빠르게 말을 했는데,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독일 학생들 다수도 그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어할 정도였다. 게다가 전임 교수는 러시아 억양으로 프랑스어와 라틴어 단어를 섞어서 수업을 진행했다. 독일인 학생들에게는 우리나라의 사자성어 혹은 속담과 같은 용어인지라, 그들은 나와 다르게 대부분을 이해했고 그렇지 않더라도 문맥상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에게는 생소하기만 한 그 단어들을 인터넷에서 찾아보느라 잠시 한눈을 파노라면, 수업 진도는 이미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빨리 진행되고 있었다.
번개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수업내용을 필기한 나의 글씨는 길 잃은 개처럼 공책 위를 방황했다. 내용을 알아들어도 알맞은 독일어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이내 한국어와 심지어 그림으로 필기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서 복습하려 공책을 펴면, 수업 당시 절망적인 나의 상태가 그 속에 그대로 적나라하게 새겨져 있는 듯 보였다.
그렇게 이 주일이 흐르자 나는 점차 한계에 도달했다. 만약 나와 같이 독일어가 모국어가 아닌 학생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했고, 어학원에서 엉터리 독일어로 이야기를 나누었던 외국인 학생들이 그리워졌다. 첫 시간에 강의실을 박차고 나가지 않은 스스로가 원망스럽기도 했고, 단 한 명 외국인 학생인 나를 선발해놓고도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는 학교가 미워졌다. 그렇다고 나름의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강의가 몇 시에 시작하던, 나는 늘 도서관 개관 시간인 9시에 맞춰 학교에 갔다. 수업이 일찍 끝나는 날에도 나는 도서관 폐관 시간까지 학교를 떠나지 않았다. 강의자료와 친구들의 강의록을 모조리 구해다가 이 잡듯 머리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머리 어딘가에 구멍이 나 있는 것이 분명했다. 강의가 시작되기 1분 전까지 아무리 책을 들여다보고 단어들을 외워도 강의가 시작되면 머릿속은 하얗게 변했고 새로운 내용은 배운 것 위에 쌓이는 것이 아니라, 엉망진창 어질러진 블록처럼 섞이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런 나의 상태를 다른 학생들에게 티 낼 수는 없었다. 과목 특성상 조별 과제가 많았는데, 만약 수업의 반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누구도 나와 같은 조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학부가 아닌 대학원인지라 학생 중에는 이전에 회사에서 일했거나 지금도 일을 하면서 공부를 하는 학생들이 많았는데, 그런 학생들은 일과 학업을 병행하느라 늘 시간에 쫓기듯 수업에 들어왔다. 그런 그들에게독일어도 제대로 못 하는 ‘폭탄’으로 한번 각인되면, 첫 학기뿐 아니라 앞으로 모든 학기 동안 나의 학교생활이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했다. 게다가 외국어로 공부하는 나의 어려움을 그들이 알아줄 거란 기대 또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공책 위에 엉터리 필기를 하면서도 늘 평온한 얼굴을 유지하려고 노력했고, 수업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어도 섣불리 질문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 질문을 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였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참고 억눌러왔던 마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폭발했다. 온종일 학교에서 독일어로 진행되는 수업을 이해하려고, 또 같이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티 내지 않으려고 애를 쓰느라 집으로 돌아오면 나는 늘 녹초가 되어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아니 어쩌면 남들에게는 밝은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독일인 친구들과 헤어지고 난 뒤, 그들이 나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면 어깨는 축 처졌고 어두운 얼굴로 무거운 발걸음 집까지 옮겨야 했다. 현관문에 키를 꽂는 순간부터 눈에는 눈물이 차올랐고 문이 닫히는 순간부터는 눈물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나면, 독일에서 공부를 그것도 독일어로 하겠다고 생각한 나 자신이 너무나 우둔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울 시간조차 나에게는 사치였다. 다른 학생들에게는 30분이면 족한 텍스트를 읽기 위해서는, 나는 내리 서너 시간을 책상에 앉아있어야 했다.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책을 폈고, 눈물을 닦으면서 책장도 함께 넘겼다.
그러던 중 전임교수와 과제 때문에 학생들이 차례대로 교수실에 들어가 상담을 하는 날이 있었다. 며칠간 남모를 고민을 하던 나에게 그 시간은 하늘에서 떨어진 동아줄 같았다. 상담이 끝나고 나는 용기를 내서 교수에게 말을 꺼냈다.
“혹시 이번 학기에 들어야 할 과목을 다른 학기에 나누어 들을 수는 없나요? 저는 아직 독일어로 모든 것을 이해하기가 어려워요. 내년에 수업을 나누어 듣게 되거나 시험을 나중에 치르게 돼도 좋아요.”
교수는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단 한마디로 대답했다.
“안됩니다.”
그리고 그의 대답은 나의 화를 돋웠다.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고, 교수실의 사물들이 바다 위에 떠있는 부표처럼 울렁거렸다.
“그.. 그건 말이 안 돼요! 아시다시피 저는 유일한 외국인이잖아요… 학교차원에서 외국인 유학생을 위한 배려 같은 건 없나요?”
그는 다시 나를 가만히 응시했고, 아까보다 조금 더 냉정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돼요. 그리고 외국인 유학생을 위한 배려 따위는 없어요. 당신은 독일어로 진행되는 수업인 것을 알고 지원한 게 아닌가요? 그리고 분명 내가 첫 시간에 힘들 것 같으면 지금이라도 포기하라고 했던 거 기억하죠? 아직 늦지 않았어요, 할 수 없을 것 같으면 지금이라도 포기하고 나가도 좋아요.”
그는 마치 정해진 매뉴얼을 읊는듯한 관청 공무원같이 친절하지만 단호하게 말을 마쳤다. 그의 입에서 나온 단어 중 희망의 말을 단 하나도 찾을 수 없었던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자신의 말에 점점 절망에 일그러진 표정을 한 나의 얼굴을 뒤로한 채 그는 어딘가에서 나의 지원 서류를 들고 오더니 그 안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음… 제인 양, 이름이 제인 맞죠?”
멍하니 그렇다고 대답하는 나를 보며 교수는 짧게 한숨을 쉬고 말을 이어갔다.
“이번에 학생들을 선발할 때, 입학인원보다 두배가 많은 학생들이 지원했어요. 그리고 제인 양은 입학 조건을 모두 충족시켰고 다른 많은 독일인 학생을 제치고 입학을 하게 되었죠. 우리가 제인 양을 선발했을 때는 다 이유가 있었어요. 이곳에서 충분히 공부할 자격과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거죠. 잘 들어요.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 말밖에 없어요. 힘들겠지만 꾸준히 노력하세요. 그리고 스터디그룹을 만들어도 좋고 모르는 것이 있다면 주변 학생들에게 도움을 청하세요. 자, 우리가 너무 많은 시간을 써서 다른 학생들을 기다리게 하는 일은 없어야겠죠? 다음 수업시간에 봅시다.”
그는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하지만 일방적으로 대화를 끝냈다. 그리고 겨우 정신을 추슬렀을 때 나는 이미 교정을 벗어나 버스정류장으로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말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나의 안에서는 어떤 불꽃같은 것이 타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분노’로 휩싸인 의지였다. 교수와의 상담은 절벽에 매달려있는 나의 손을 발로 밟은 격이었다. 그리고 절벽에서 떨어진 곳에는, 진흙탕 같은 땅이 있었다. 비록 내려앉은 곳이 꽃밭처럼 아름다운 곳은 아니어도, 한 발짝도 쉽게 내딛을 수 없어도 나의 발은 그제야 독일 땅에 내려앉은 것 같았다. 이제 더 이상 숨을 곳도 숨길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드니 그날은 집에 와서도 울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불안과 자존심으로 두껍게 가려져 있던 ‘괜찮다는 가면’을 모두 내려놓고 독일인 학생들에게 먼저 다가갔다. 수업 중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으면, 수업이 끝난 후 누구라도 잡고 도움을 요청했다.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재무제표 과목에 관해서는 독일인 학생들과 스터디 그룹을 먼저 자원해서 만들었다. 마음을 터놓고 나의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니, 독일인 학생들에게도 조차 이 모든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힘겨운 발자국을 천천히 내딛으려 할 때쯤 또 다른 시련이 다가왔다. 그것은 디자인 역사 강의 중 받은 과제였는데, 책 한 권의 여러 챕터를 조별로 나누어 읽고 돌아가며 발표를 하라는 것이었다. 운 좋게도 옆에 앉아있던 친구들과 조를 짜게 되었지만, 그들은 열성적인 학생에 속하는 그룹이었고 바로 다음 주에 발표를 하겠다고 자처했던 것이었다.
- 작가: vivaJain / 일러스트: Soorimm
우연히 독일에 와서 비스바덴에 6년째 거주 중입니다. 쉽게 변하지 않는 것들을 사랑합니다.
- 본 글은 vivaJain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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