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P. 07
G – Gewohnheit (습관)
DSH 준비반에 모인 사람들은 처음에는 여덟 명이었으나, 나중에는 점차 열두 명으로 늘어났다. 학생들의 출신은 역시나 저마다 다양했지만, 목표는 하나였다. 그것은 12월에 열리는 DSH 시험에 붙는 것이었다. 독일어 수업은 매일 순조롭게 흘러갔고, 학생들의 실력도 눈에 띄게 늘어갔다. 수업은 매일 9시에 시작해서 1시가 되면 끝이 났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학생들에게는 늘 독일어 작문 숙제가 주어졌다.
독일어 시험은 가장 기초인 A1 단계부터 읽기, 듣기, 쓰기 그리고 말하기 네 가지 영역으로 구성되어있다. 그중 외국어 시험에서 말하기와 쓰기는 나에게 특히나 어렵게 느껴졌던 분야였다. 읽기와 듣기는 다른 사람의 말이나 생각을 이해하는 정도에 그치지만, 쓰기와 말하기에서는 내 생각을 능동적으로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모국어가 아닌 남의 말로 말이다. 그래서 ‘나는 사과를 좋아합니다’ 따위의 문장을 겨우 쓸 때부터 독일어를 배움과 함께 글쓰기를 배우게 된다. ‘독일어’를 배우는 것은 단순히 A라는 문장을 한국어 대신 독일어로 쓰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독일어는 독일어만의 논리가 있고, 그것이 한 문장이 아니라 여러 문장으로 이루어진 글이 될 경우에는 그것이 더 중요하다. 내가 사과를 좋아한다는 얘기가 이 글에 필요한 문장인지, 내가 사과를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왜 하필 다른 과일이 아닌 사과를 좋아하는지 따위의 이유가 뒤에 덧붙여지지 않으면 ‘나는 사과를 좋아합니다’라는 문장은 쓸모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수업 진도에 따라서 주제는 매번 달라졌고, 우리는 거의 매일 A4 한 장 분량의 글을 쓰는 연습을 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매번 백지를 마주쳐야 하는 것을 뜻한다. 줄만 쳐진 새하얀 공책 위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만약 과일이 그날의 주제라면, 독일어로 과일 이름을 찾아보던지 과일과 관련해서 쓰이는 독일어 문장이 무엇이 있는지를 알아봐야 한다. 혹은 간단하게라도 내가 과일과 관련해서 쓰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스스로 단어를 나열하던지, 하다못해 한국어로라도 메모를 해서 생각의 스케치를 해 놓아야 한다. 이때 주의할 점은, 과일과 관련해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고 그 말의 근거 또는 이유는 무엇인지가 들어가지 않으면 독일어 문법 혹은 철자 상의 문제가 없어도 좋은 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문법과 철자가 완벽해도 논리가 부족한 글은 조금의 실수가 있더라도 자기 생각을 명쾌하게 표현한 글보다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독일에서 글쓰기 공부를 같이하게 된 셈이다. 하지만 빠르게 나가는 수업 진도에 맞춰 우리가 매일 새로 배우게 되는 단어는 너무나 많았다. 게다가 독일어에 규칙은 왜 이리도 많은 건지, 우리는 하루는 미래에 대해 말을 하는 법을 배우고 다음 날에는 미래의 일을 가정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미래의 일을 미처 능숙하게 이야기를 하기도 전에, 다른 사람의 말을 전할 때는 어떤 문법이 쓰이는지를 익혀야 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들을 글쓰기에 녹여내야 했다. 보통은 A4 한 장 반 정도로 분량은 많지 않았다. 한 장이 채 안 되면 너무나 짧았고 두 장이 넘어가면 글은 중구난방으로 흘러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빠삭하게 알고 있는 이론과 실전은 달랐다. DSH 준비반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의 나의 글은 마치 초보 서커스 단원의 저글링과 같았다. 공은 독일어 단어였고, 그 공들은 모두 놓쳐버려서 바닥에 떨어져 있는 꼴과 비슷했다. 글들은 대개 서론만 거창하고 마무리를 하지 못해서, 꼭 엄청난 쇼가 곧 시작될 것처럼 말해놓고는 겨우 리본을 단 원숭이만 하나 앉혀놓은 모양새였다. 선생님은 매일 무자비하게 굵은 펜으로 나의 글에 모자란 곳을 확인시켜 주었다. 채점한 글쓰기 숙제를 돌려받고 나면 나는 늘 풀이 죽었다. 선생님의 펜이 지나간 곳에는 화가 난 관중의 야유가 들리는 듯했다.
그러고 보면 나는 한국어로조차 글을 제대로 써본 적이 별로 없었다. 대학 수학능력시험이라는 거창한 학창 시절의 마지막 시험에서도 조차 본인 식별을 위한 필적 확인 문구 외에는 답안지에 문장을 쓸 일이 없기도 했다. 언어 영역에서도 다양한 시대와 저자의 글을 읽고 그 주제를 파악해서 다섯 가지 답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 주어진 과제의 전부였다. 물론 초중교 학교 때 글쓰기를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무슨 무슨 날에는 늘 백일장이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곤 했던 기억이 있지만, 글쓰기에 유독 재능이나 관심이 있던 애들을 제외하고는 그저 글자 수만 채우면 누릴 수 있는 자유시간이 돼버리고는 했다. 물론 백일장의 결과는 성실하게 글을 써낸 학생들에게는 다양한 이름의 상으로 보상이 주어졌다. 하지만 그 외의 학생들에게 글에 대한 피드백은 거의 없었고, 강제성 또한 없었다. 고등학교 때에는 논술시험을 봐야 하는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수업 내용을 필기할 때 외에 글을 쓸 필요는 없었다. 그런 아이들도 그제야 부랴부랴 방과 후 논술 수업을 들으러 다녔다. 대학교에서도 디자인을 공부한 터라 리포트 대신 과제를 제출했기에 글을 쓸 기회는 더욱이 적어졌었다.
반면 독일의 학생들은 어릴 때부터 말하고 쓰는 시험을 치르게 된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학생들은 글쓰기 숙제를 해서 남들 앞에서 발표하는 수업을 받는다고 한다. 독일의 대학 수학능력시험 격인 ‘Abitur’에서도 학생들은 영역에 따라 말하기와 쓰기 중 하나를 선택해서 답안지를 작성해야 한다. 독일에서는 어릴 때부터 자기 생각을 주제에 맞게 쓰고, 남들에게 전달하는 연습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독일에서 대학 수업을 받고자 하는 외국인들에게도 일정 수준의 논리력이 요구되는 글쓰기와 말하기가 요구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독일어의 난이도가 올라가면서 쓰이는 단어뿐만 아니라 글의 구성과 논리력이 중요해졌다. 독일어 초·중급 단계의 글쓰기는 논리력보다는 주로 정해진 상황에서 편지를 쓰거나, 한 가지 주제에 대해서 자기 생각을 풀어쓰는 능력이 요구된다. 하지만 DSH 시험의 글쓰기는 달랐다. 학생들은 ‘주어진 그래프가 무엇을 설명하고 의미하는지 묘사하시오. 그리고 그래프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그 주제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예시를 들어 설명하시오’ 같은 글쓰기 문제를 마주치게 되었고 대부분은 나처럼 패닉에 빠지기 일쑤였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학창 시절 글쓰기를 많이 안 해본 학생들이 유독 글 쓰는 것을 가장 어려워했다. 한국어에서 독일어로 언어는 바뀌었지만, 글쓰기의 습관은 그대로 남아있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독일어로 쓰인 나의 글은 주장은 그럴듯했으나 늘 근거가 빈약했다. 그리고 어릴 적 백일장을 꾸역꾸역 채워 넣듯 글을 쓰던 나의 마음가짐도 그대로였다.
그리고 마음가짐은 글에 그대로 드러난다고 했던가, 한 번도 빠짐없이 글쓰기 숙제를 해오고 심지어 남들보다 두 배 세배 글을 써도 글쓰기는 생각처럼 곧잘 늘지 않았다. 그리고 나만큼 나의 글을 자주 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건 당시 매일 같이 나의 글을 교정해주던 남자 친구였다. 그는 내가 글쓰기로 하소연을 할 때마다 독일어로 글 쓰는 것이 어려운 것을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이해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것 봐. 또 글쓰기가 문제야. 선생님이 여기 물음표 쳐놓은 거 보여? 도대체 무슨 말이냐는 거지.”
“제인. 너는 잘하고 있지만, 글쓰기를 항상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아.”
“맞아. 글을 쓰는 것은 재밌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해서 한 이야기를 풀어쓰는 게 너무 힘들어. 독일어 문법을 하나하나 신경 쓰면서 말이야.”
“그건 어쩔 수 없어. 독일어 맞춤법과 문법이 맞지 않으면 독일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니까. 대소문자 구별부터 쉼표 마침표가 놓여할 곳 하나까지 엄격한 사람들인걸. 그건 독일에서 교육받은 나도 항상 노력하는 거야. 그건 기본이고, 물론 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분명히 적어야 해”
믿었던 남자 친구마저 독일어 글쓰기에 대해서는 이렇게 단호하게 나와버리니, 나는 결국 자신밖에는 믿을 구석이 없어졌다. 그리하여 갖고 있던 글쓰기 습관을 버리고 다시 처음부터 글 쓰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우선 독일어로 쓰인 한 페이지 분량의 기사들을 많이 읽었다. 그것도 하나하나 분석하면서 말이다. 글은 주로 독자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면서 주제를 암시하는 서론과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인 본문 그리고 글을 마무리하는 결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중과 순서의 차이가 있어도 내가 본 대부분의 독일어 글은 그렇게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모든 글에는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다. 그게 아니면 저자는 글을 쓰지도 않았을 테니 말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바는 주로 적게는 두 가지 많게는 다섯 가지의 이유로 뒷받침된다. 논거의 수가 그 이하가 되면 글의 논리가 빈약해지고 그 이상이 되면 글은 장황해진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내가 취약한 부분이었다. 논리가 튼튼하지 않으니, 글의 마무리가 약해지고 결과적으로 독자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늘 글을 쓰기 전에 간단히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나의 주장 한 문장 그리고 그에 대한 이유 세 가지. 나의 글 계획서는 마치 발표를 위한 노트같이 보였다. 하지만 그 작은 쪽지를 가지고 글을 쓰기 시작하니 더는 내 앞에 놓인 백지가 예전처럼 막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계획은 이미 내 손안에 있으니 이제는 알고 있는 단어와 문장으로 뼈대와 살을 붙이면 되었다. 그리고 나 스스로 글의 구조를 이해하고 있으니 글이 산으로 갈 일도 적어졌다. 글의 내용과 맞지 않는 단어들도 눈에 더 잘 띄게 되었다. 가지고 있던 습관을 버리고 최대한 독일 사람들이 내가 원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쓰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 노력은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다. 선생님께 돌려받은 숙제 위에는 냉정한 물음표나 밑줄이 하나씩 줄어들게 되었다. 그리고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는 선생님으로부터 물음표가 아닌 느낌표가 세 개나 적힌 숙제를 돌려받을 수 있었다.
‘Prima(매우 잘했어)!!!’
- 작가: vivaJain / 일러스트: Soorimm
우연히 독일에 와서 비스바덴에 6년째 거주 중입니다. 쉽게 변하지 않는 것들을 사랑합니다.
- 본 글은 vivaJain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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